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라예보 사건 (문단 편집) == 관련자들의 이후 행보 == *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 ~ 1918) *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1895 ~ 1916) * 트리피코 그라베즈 (1895 ~ 1916) * 치베트코 포포비치 (1896 ~ 1980) * 바소 추브릴로비치 (1897 ~ 1990)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전 세계의 수백만 명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어 가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테레진슈타트[* 지금의 [[체코]] 북부에 있는 테레진(Terezin). 테레진슈타트(Theresienstadt)는 독일식 이름이다.]의 [[교도소]]에서 지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가브릴로를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법에 따으면 만 20세가 넘어야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가브릴로는 범행 당시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서 [[미성년자]]인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대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를 적용하고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가브릴로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잘 치료하지도 못한 채 독방에 감금되었고 외부와 단절된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져 지독한 결핵과 함께 합병증으로 피부궤양까지 앓게 되면서 결국 자살극을 벌이기까지 하다가 1916년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가브릴로는 세계 대전이 일어날 줄은 알았다고 하지만 그 대전을 자기가 일으켰다는 사실에는 동요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면담 당시 세르비아는 붕괴하여 전 국토가 점령을 당하는 국난을 겪는 중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가브릴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브릴로는 1918년 교도소 안에서 유대인 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사했다. 가브릴로 말고도 다른 공범 4명이 더 있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증언에 따라 주동자들이 하나 둘 체포되면서 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이들 역시 암살 계획에만 가담했고 피살자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암살을 저지른 프린치프가 사형이 아닌 판국에 이들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처럼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에 병사했으며 다른 3명도 교도소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죽기 전에 암살자들 중 유일하게 심경 변화를 일으켜 암살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밝혔고 그 소식을 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유자녀들이 그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1명인 [[https://en.wikipedia.org/wiki/Vaso_Čubrilović|바소 추브릴로비치]](Васо Чубриловић)는 1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차 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들어서면서 살아서 석방되었고 1939년 베오그라드 대학 교수를 지냈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 연방]]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으면서 유고슬라비아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농업장관과 삼림장관까지 지냈다. 이후 60년이나 더 살다가 1990년 6월 11일 93살에 병사하면서 범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본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유고슬라비아 전쟁]]만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사망 만 1년 후인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연방을 탈퇴했다. 추브릴로비치 등 사라예보 사건의 주도자들은 세르비아인보다 더 큰 단위의 남슬라브족을 모두 아우르는 민족국가를 원했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들이 지향하던 남슬라브인의 민족국가에 아주 근접하는 데 성공했던 국가였고 따라서 추브릴로비치 일행의 입장에서는 유고슬라비아야말로 본인들의 조국이라고 여길 만한 나라였다는 것. 남슬라브 민족주의의 정착 실패에 대해서는 [[유고슬라비아]] 문서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문서에 설명되어 있으며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서 등도 참고할 만하다. 또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안녕 요정]] 역시 남슬라브 민족국가운동의 처참한 말로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흥미 있는 사람이라면 봐도 나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말년에는 청년 시절의 이념들과 거리를 뒀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후회하는 말도 했다고 한다. 암살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총독은 황태자 부부의 암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계속 괴로워했고 제국 정부에서 주전파로서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을 주장했다. 이후 술에 의존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낙향한 뒤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포티오레크 본인이 이 사라예보 방문을 실무적으로 추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부부의 위신도 살려주고 본인도 황태자에게 '점수'를 딸 겸 행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황태자 부부를 프린치프 앞으로 데려가 버린 운전사인 레오폴드 로이카는 어디까지나 명령에 따라 운전을 한 것 뿐이라서 따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도의적인 책임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가족, [[빌헬름 2세]]에게 사과문을 썼다. 이후 프린치프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카를 1세]]에게 퇴직금을 받고 은퇴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Brno)에 황제에게 받은 퇴직금으로 여관을 차려서 살았다. 가끔 여관 손님들에게 사라예보 사건 때 우연히 구한 조피와 페르디난트의 유품을 구경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26년에 병으로 겨우 39살로 [[요절]]했다. [[https://en.m.wikipedia.org/wiki/Leopold_Lojka|Leopold Lojka(영어 위키백과 문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